「토이 스토리 5」에는 전통적인 빌런이 없습니다. 시드도, 랏소도, 스팅키 피트도 아닌, 아이 손바닥만 한 스마트 태블릿 '릴리패드'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장난감 영화에서 악당 없이 긴장감을 만들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빌런 부재: 릴리패드가 악당이 아닌 이유「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편마다 명확한 악의를 가진 존재를 내세웠습니다. 1편의 시드는 장난감을 파괴했고, 3편의 랏소는 배신과 집착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래서 5편 예고편을 보며 릴리패드가 어떤 방식으로 장난감들을 위협할지 자연스럽게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달랐습니다.릴리패드는 악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보니를 진심으로 돕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솔직히 저는 「주토피아 2」를 보기 전까지 그냥 전작의 인기를 이어가는 후속작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생겼고, 제가 일상에서 겪었던 관계들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동물들의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은지, 그 이유를 하나씩 짚어봤습니다.공존이라는 말의 실제 무게「주토피아 2」는 표면적으로 파충류 공동체가 주토피아에 편입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공존 맞나?"였습니다. 영화 속 주토피아는 공존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동물들이 기후 구역에 따라 영역을 나누고 부서를 나누어 살아갑니다. 이건 공존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설계된 분리(segregation)에 가깝습니다. 분리란 각 집단이 같은 공간 안..
직장에서 평가 결과를 기다리던 날 밤, 저는 이상하게도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열심히 했다는 확신보다 '혹시 내가 모르는 이유로 잘려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나서 그 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이 영화는, 해고 이후 한 남자가 조금씩 선을 넘어가는 과정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담아냅니다. 웃기면서도 섬뜩했고, 허구 같으면서도 지독히 현실적이었습니다.해고 트라우마 — 평범한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영화는 유만수가 가족과 바비큐를 즐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잘 지은 집, 웃는 아내, 평화로운 주말. 제가 직접 이 오프닝을 보면서 든 첫 생각은 "이 사람, 곧 다 잃겠다"였습니다. 너무 행복해 보이..
부모가 건네는 말 한마디가 칭찬인지 잔소리인지, 그 순간엔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저도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말이 걱정이었구나" 싶었던 적이 있었고, 반대로 제가 건넨 말이 상대에게는 간섭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쓱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영화 「사도」는 그 어긋남이 극단까지 치달으면 어떤 비극이 되는지를 조선 왕실의 실화로 보여줍니다.부자갈등: 사랑이 기대로 굳어질 때영조는 늦둥이 아들 이선(사도세자)을 누구보다 아꼈습니다. 두 살에 천자문을 외우고, 세 살에 사치와 검소를 구분했다는 일화는 영조의 기대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내 조기 교육이라는 이름의 압박으로 변했고, 세자는 생후 100일 만에 생모와 떨어진 채 왕세자 책봉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습니..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 「히말라야」를 보기 전까지 저는 이걸 단순한 등반 도전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이 다리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장면에서 손이 멈췄습니다. 이 영화는 정상 정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는 이야기였습니다.실화가 더 무거운 이유 — 두 사람의 만남과 배경제가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된 건 줄거리보다 실화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엄홍길 대장은 히말라야 8,000m급 16좌를 완등한 세계적인 산악인입니다. 여기서 히말라야 16좌란 해발 8,000m가 넘는 세계 최고봉 14좌에 더해 엄홍길 대장이 독자적으로 추가한 야마다 노보루봉과 로체샤르를 포함한 16개의 봉우리를 말합니다.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산악인조차 완등하기 힘든..
쿠퍼가 우주에서 홀로 받아보는 가족의 영상 메시지. 아들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딸 머피는 이미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돼 있습니다. 떠난 쪽은 몇 시간이 흘렀는데, 기다린 쪽엔 수십 년이 쌓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극장 의자에 등을 기댈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구나, 그리고 그게 꼭 우주 얘기만은 아니겠구나 싶었으니까요.가족의 시간 — 기다리는 쪽과 떠난 쪽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영화 속 지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입니다. 블라이트(Blight)라고 불리는 식물 역병이 작물을 차례로 죽이고, 흙먼지 폭풍이 매일같이 마을을 덮습니다. 여기서 블라이트란 특정 병원균이 식물 전체를 고사시키는 광역 식물 질병을 의미하는데, 영화는 이 단어 하나로 지구 문명이 얼마 남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에서 미란다는 디지털 전환과 AI 운영을 앞세운 런웨이 인수 시도 앞에서 자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솔직히 이 장면을 보면서 제가 처음 일을 시작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자꾸 주변의 반응만 살피던 그 시절이요.미란다 변화 — 독설은 사라지고, 두려움이 남았다1편의 미란다 프리슬리는 코트를 던지듯 내려놓고, 비서에게 독설을 날리며 패션계를 지배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2편에서 그 미란다가 달라졌습니다. 직접 코트를 걸어야 하고, 브랜드에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이 변화는 단순히 캐릭터 설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패션 잡지의 위상이 실제로 낮아진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미란다의 모티브인 보그 편집장 안나..
재난 영화를 보면서 울컥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그동안 재난 영화를 볼 때 스펙터클한 장면에만 집중했는데, 「해운대」는 달랐습니다. 거대한 파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가족을 찾아 뛰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저는 곧장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쓰나미 경고, 대피령보다 먼저 온 감정영화 초반, 대마도 근해에서 규모 6.5의 지진이 발생합니다. 지진학에서 규모(Magnitude)란 지진파가 방출하는 에너지의 크기를 수치로 나타낸 것으로, 규모 6 이상은 건물 붕괴와 지반 액상화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저 정도 수치면 진짜 위험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극 중 인물들의 반응이 현실과 너무 닮아 있어서 오히려 더 무서웠습니다.특히 기억에 남..
솔직히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저는 그냥 '잘 만든 법정 드라마'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문장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게 정말 맞는 걸까?"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영화 「변호인」은 1981년 실제로 있었던 부림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조작된 공안 사건 속에서 한 변호사가 헌법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부림사건: 독서 모임이 범죄가 됐던 시절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충격받은 건 불온서적으로 지목된 책들의 목록이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전환시대의 논리』. 지금은 고등학생도 읽는 필독서들이 1981년에는 누군가를 구속시키는 증거가 됐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습니다.영화의 모티..
2016년 개봉한 「부산행」은 국내 좀비 장르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입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좀비 액션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화면에서 무서웠던 건 좀비가 아니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줄거리: 열차 안에서 시작된 감염 확산영화는 경기도 바이오단지 인근 방역 통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통제선을 통과한 트럭 뒤편에서 죽었던 고라니가 눈이 하얗게 뒤집힌 채 다시 일어서고, 이 짧은 장면 하나가 이후 모든 공포의 출발점이 됩니다.서울의 펀드매니저 서구는 이혼 소송 중이고, 딸 수아를 혼자 키우고 있습니다. 수아의 생일에도 지난 어린이날과 똑같은 게임기를 선물하는 장면은 솔직히 보면서 조금 찔렸습니다. 저도 바쁘다는 이유로 가까운 사람이 원하는 것을 나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