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토이 스토리 5」에는 전통적인 빌런이 없습니다. 시드도, 랏소도, 스팅키 피트도 아닌, 아이 손바닥만 한 스마트 태블릿 '릴리패드'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장난감 영화에서 악당 없이 긴장감을 만들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빌런 부재: 릴리패드가 악당이 아닌 이유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편마다 명확한 악의를 가진 존재를 내세웠습니다. 1편의 시드는 장난감을 파괴했고, 3편의 랏소는 배신과 집착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래서 5편 예고편을 보며 릴리패드가 어떤 방식으로 장난감들을 위협할지 자연스럽게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달랐습니다.

릴리패드는 악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보니를 진심으로 돕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계 배우 그레타 리가 연기한 릴리패드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안정적이었는데, 그 다정함이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악당은 나쁜 의도가 있을 때 맞서기 쉽습니다. 그런데 "나는 네 편이야"라고 말하는 존재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는 훨씬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가 직접 스마트폰을 쓰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잠깐 검색하려고 켰다가 알고리즘(algorithm)이 추천해 준 영상에 이끌려 한 시간이 지나 있을 때, 저를 붙잡은 건 나쁜 의도가 아니라 철저하게 최적화된 친절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알고리즘이란 사용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 가장 반응할 가능성이 높은 콘텐츠를 자동으로 선별·제공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릴리패드가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도 정확히 같은 맥락입니다. 선의처럼 보이는 편리함, 그것이 5편이 고른 진짜 적입니다.

  • 기존 시리즈의 빌런: 시드(1편), 알·스팅키 피트(2편), 랏소(3편) — 모두 명확한 악의 보유
  • 5편의 릴리패드: 악의 없음, 보니를 돕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스마트 태블릿
  • 핵심 공포: 나쁜 기술이 아니라 선의처럼 작동하는 편리함
요약: 5편의 진짜 위협은 악의적 빌런이 아니라, 선의를 가장한 알고리즘의 다정한 편리함입니다.

 

릴리패드와 보니: 사이버 불링이 남긴 역설

8살 보니는 장난감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또래에게 놀림받을까 두려워합니다. 부모는 해결책으로 릴리패드를 선물합니다. 영화 초반 릴리패드를 통해 보니는 빠르게 친구들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스마트 기기가 아이의 사회성을 망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이 장면을 보며 느낀 건 좀 달랐습니다. 실제로 디지털 공간이 오프라인에서 사회적으로 위축된 아이에게 일시적인 연결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보니가 장난감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채팅방에서 알려지면서 사이버 불링(cyberbullying)이 시작됩니다. 사이버 불링이란 디지털 기기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이루어지는 따돌림·괴롭힘을 뜻합니다. 친구를 만들어줬던 바로 그 화면이, 같은 화면을 통해 보니를 다시 밀어내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겁니다. 이 장면이 꽤 날카롭게 느껴진 건, 현실에서도 실제로 같은 구조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아동의 스크린 타임(screen time) 과다 노출이 사회적 고립감과 불안을 심화할 수 있다고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습니다(출처: 미국 소아과학회(AAP)). 스크린 타임이란 하루 중 스마트폰, 태블릿, TV 등 화면을 바라보는 총 시간을 의미합니다. 보니의 경험은 이 경고가 통계가 아닌 감정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서사 장치였습니다.

요약: 릴리패드는 보니를 연결시켜준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보니를 다시 고립시키는 역설적 도구였습니다.

 

제시의 귀환: 트라우마를 행동으로 바꾼 캐릭터

5편의 정서적 중심은 우디가 아닌 제시입니다. 제가 이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단순히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을 넘어서는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시는 원래 첫 주인 에밀리에게 버려진 유기 트라우마(abandonment trauma)를 가진 캐릭터입니다. 유기 트라우마란 가까운 존재로부터 버려진 경험이 남긴 심리적 상처로, 이후 유사한 상황에서 과도한 불안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보니가 릴리패드에 집중하며 장난감들을 방치하기 시작하자, 제시의 트라우마가 다시 자극됩니다. 과거 시리즈였다면 이 감정이 무너지는 방향으로 흘렀을 텐데, 5편의 제시는 달랐습니다. 자신의 공포를 에너지로 전환해 보니를 지키려는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위기를 먼저 알아채고, 우디에게 상황을 알리고, 장난감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쪽은 제시였습니다.

반면 우디는 조금 애매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4편에서 스스로 선택해 팀을 떠났던 우디가 무전 한 통에 돌아오는 설정은 솔직히 4편 이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면이 있었습니다. 우디의 외모 변화(머리 페인트 벗겨짐, 배 나옴)가 1편을 극장에서 봤던 세대의 중년화를 반영한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깊은 성찰보다는 개그로 소비된 것이 아쉬웠습니다. 버즈 역시 고백 타이밍을 못 잡는 로맨틱 코미디 조연으로 머물렀다는 점에서, 이번 편의 진짜 성장 서사는 제시에게 있었습니다.

요약: 5편의 감정 중심은 제시이며, 트라우마를 행동으로 전환하는 그녀의 서사가 이번 편의 진짜 성장 이야기입니다.

 

픽사의 자화상: 밀어냈던 자리에서 밀려날 차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AA 배터리 3인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코난 오브라이언이 목소리를 맡은 배변 훈련기 스마티 팬츠, 내비게이션 하마 아틀라스, 카메라 장난감 스내피는 모두 한때 혁신적이었지만 지금은 더 빠른 기술에 밀린 구형 기계들입니다. 이들의 존재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릴리패드 역시 언젠가 더 빠른 스마트폰에 밀려날 시한부 존재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메타포(metaphor)가 한 겹 더 생깁니다. 메타포란 어떤 개념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에서는 픽사 자신의 처지를 릴리패드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픽사는 풀 3D CG 애니메이션으로 셀 애니메이션 시대를 밀어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AI 생성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면서 픽사 자신이 밀려날 차례를 걱정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됐습니다. 릴리패드를 빌런으로 두지 않은 선택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실제로 AI 생성 콘텐츠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McKinsey Global Institute)는 생성형 AI(Generative AI)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생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출처: McKinsey Global Institute). 생성형 AI란 텍스트, 이미지, 영상 등 새로운 콘텐츠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공지능 기술을 말합니다. 픽사가 이 시점에 "밀어내는 기술을 악당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건, 단순한 서사 결정이 아니라 자기 고백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결말에서 장난감들은 릴리패드를 부수는 대신 알고리즘적 약점을 역이용해 보니를 이웃 소녀 블레이즈와 연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장난감과 기술이 적이 되는 대신 같은 편이 되어 아이가 혼자가 되지 않도록 돕는 이 결말은, "기술을 없애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기술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훨씬 더 어렵고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요약: 릴리패드를 빌런으로 두지 않은 선택은 픽사 스스로가 기술 대체의 불안을 인정한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토이 스토리 5에서 릴리패드는 결국 어떻게 되나요?

A. 릴리패드는 파괴되지 않습니다. 장난감들은 릴리패드의 알고리즘 구조를 역이용해 보니가 이웃 소녀 블레이즈와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합니다. 기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함께 아이를 돕는 방향으로 결말이 흘러갑니다.

 

Q. 토이 스토리 5는 아이들보다 어른을 위한 영화인가요?

A. 두 세대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지만 무게중심은 어른 쪽에 기울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접했고 이제 자녀에게 태블릿을 쥐여줄지 고민하는 세대, 즉 1편 관객층이 주 타깃입니다. 영화 속 메시지 전달 방식이 아이의 두려움보다 부모의 죄책감을 위로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도 이 영화가 어른을 위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습니다.

 

Q. 토이 스토리 5에서 우디와 버즈의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요?

A. 기존 시리즈보다 비중이 많이 줄었습니다. 이번 편의 서사 중심은 제시이며, 우디는 조력자 역할로 물러나 있습니다. 버즈는 로맨틱 코미디 조연에 가깝게 소비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디가 주인공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5편은 제시의 영화에 가깝습니다.

 

Q. 토이 스토리 5, 아이랑 같이 봐도 괜찮을까요?

A. 충분히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사이버 불링 장면은 초등학생 자녀와 사전에 이야기를 나눠두면 더 좋습니다. 영화 자체는 디지털을 무조건 나쁘게 그리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므로, 오히려 부모와 아이가 스마트 기기 사용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토이 스토리 5」는 장난감이 태블릿을 이기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가 마음을 숨기는 시대에, 장난감이 어떤 방식으로 아이 곁에 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영화가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세 갈래 플롯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산만해지고, 메시지가 감정보다 먼저 도착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제 평가로는 5점 만점에 4점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 오래 남은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AI는 더 다정해질 것입니다. 그 변화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려주고, 직접 손을 잡아주고, 함께 있어주는 존재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이 스토리」가 오래 사랑받은 이유도 결국 장난감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했던 마음 때문일 테니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A3HWuiTq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