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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평가 결과를 기다리던 날 밤, 저는 이상하게도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열심히 했다는 확신보다 '혹시 내가 모르는 이유로 잘려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나서 그 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이 영화는, 해고 이후 한 남자가 조금씩 선을 넘어가는 과정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담아냅니다. 웃기면서도 섬뜩했고, 허구 같으면서도 지독히 현실적이었습니다.
해고 트라우마 — 평범한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
영화는 유만수가 가족과 바비큐를 즐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잘 지은 집, 웃는 아내, 평화로운 주말. 제가 직접 이 오프닝을 보면서 든 첫 생각은 "이 사람, 곧 다 잃겠다"였습니다. 너무 행복해 보이는 장면에는 언제나 불안이 숨어 있다는 걸 우리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예상대로 만수는 해고됩니다. 미국계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 즉 외부 자본이 기업을 인수한 뒤 비용 절감을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방식으로 밀려납니다. 여기서 사모펀드란 소수의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운영한 뒤 수익을 내는 투자 구조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람보다 숫자가 먼저인 조직이 들어온 순간 경력이 길다는 사실 자체가 해고 사유가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회사가 보내온 장어 선물이 사실은 해고의 전조였다는 장면에서, 제 경험상 이런 신호는 현실에서도 꽤 비슷하게 옵니다. 갑자기 친절해지는 상사, 명절 선물, 회식 자리. 뭔가 좋은 일이 생기기 직전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론 반대인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 장면이 유독 오래 남았습니다.
만수는 면접장에서 자신의 가장 큰 단점으로 "싫은데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을 꼽습니다. 이 한 마디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캐릭터 설명입니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자리를 잃었을 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 미국계 사모펀드의 인수 → 구조조정 → 경력 많은 직원부터 해고
- 장어 선물 = 해고 통보의 위장술 (영화적 블랙유머)
- "싫다"는 말을 못 하는 성격 → 평생 억눌린 자아의 폭발 복선
- 집값 하락, 대출 3억 초과 → 경제적 압박이 심리적 붕괴를 가속
블랙코미디의 해부 — "어쩔 수 없다"는 말의 위험성
만수가 선택한 방법은 황당하면서도 치밀합니다. 허위 구직 광고를 내어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받고 등급을 매겨 제거 대상을 추리는 장면은, 제가 처음 봤을 때 실소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웃고 나서 곧바로 서늘해졌습니다. 그 치밀함이 낯설지 않았거든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를 분석하고, 정보를 모으고,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것. 만수가 한 일은 그 연장선에서 시작된 겁니다.
여기서 영화가 사용하는 핵심 장치가 미장센(Mise-en-scène)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공간·조명·배우의 위치·소품 등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영화적 기법을 말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기법을 통해 만수가 경쟁자를 엿보는 장면, 음침한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 등에서 대사 없이도 인물의 심리를 정확히 전달합니다. 제가 직접 두 번 보면서 느낀 건, 대사보다 화면 구성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는 점이었습니다.
'도끼'는 이 영화에서 이중적 상징으로 쓰입니다. 해고(영어로는 흔히 'axed', 즉 도끼질로 표현됩니다)이자 실제 폭력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만수가 "어쩔 수 없다"를 되뇌는 순간마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아니라 위선적 합리화의 주문이 됩니다. 그리고 이 주문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들립니다. "가족을 위해서", "나도 살려고 그랬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이 대사들을 들었을 때 예상 밖으로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이병헌의 연기는 이 지점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공감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동기만큼은 이해 가능하도록 유지하는 것, 그게 얼마나 어려운 연기인지 보면서 실감했습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영화의 정서적 중심축입니다. 해고 소식에 침착하게 반응하면서도 남편을 다시 세우려는 그 현실주의적 회복력이, 오히려 만수의 선택을 더 비극적으로 만듭니다.
자본주의의 도끼질 — 이 영화가 지금 나온 이유
영화 말미에 만수는 결국 면접에 합격합니다. 꺼져가는 공장 불빛 아래서 혼자 쾌재를 부르는 그 장면이, 제 기억에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원하던 것을 얻었는데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 그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이 화면 밖에서 무게감으로 눌러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만수의 부친이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다는 사실을 통해 세대를 가로지르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사회는 필요할 때 역할을 주고, 필요가 사라지면 버린다. 이 구조는 전쟁터에서도, 공장에서도, 사모펀드가 인수한 회사에서도 반복됩니다. 출처: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자동화와 AI 도입으로 향후 10년간 전 세계 수억 명의 일자리 구조가 재편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영화가 지금 이 시점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조조정(Restructuring)이란 기업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력·부서·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것이 '오래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경험이 많다는 것이 오히려 비용이 된다는 역설. 만수가 겪은 일입니다. 출처: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조사에 따르면 40~50대 중장년층의 비자발적 퇴직 비율은 매년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제 경우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직업이 나를 정의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해 봤습니다. 만수는 종이 업계에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걸었고, 그것을 빼앗기자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직업은 삶의 수단이지, 삶 자체가 되어서는 위험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비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원작 소설을 박찬욱 감독이 한국 중년 남성의 이야기로 재해석한 이 각색 방식도 눈여겨볼 지점입니다. 보편적인 인간의 불안을 한국적 맥락에 정확히 이식해 낸 덕분에, 베니스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가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어쩔 수가 없다 원작이 따로 있나요?
A. 있습니다. 미국 소설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범죄 소설을 박찬욱 감독이 한국 상황에 맞게 각색한 작품입니다. 원작은 블랙유머 범죄물의 고전으로 꼽히며, 박찬욱 감독은 이를 중년 실직 남성의 이야기로 재해석하면서 한국 사회 특유의 정서를 녹여냈습니다.
Q. 영화 속 '도끼'가 무슨 의미인가요?
A. '도끼'는 해고와 폭력을 동시에 상징하는 이중적 장치입니다. 영어에서 해고를 'axed(도끼질당했다)'라고 표현하는 데서 착안한 것으로, 만수가 당한 해고와 그가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같은 도끼질임을 암시합니다. 영화의 핵심 테마를 한 단어로 압축한 상징입니다.
Q. 베니스 영화제에서 9분 기립박수를 받은 게 사실인가요?
A. 사실입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으며, 이는 박찬욱 감독의 국제적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장면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과 블랙코미디적 연출이 해외 관객에게도 강하게 작동했다는 방증입니다.
Q. 이병헌, 손예진 외에 다른 배우도 나오나요?
A.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 등 국내 정상급 조연 배우들이 대거 출연합니다. 각자 만수의 경쟁자이자 또 다른 '몰락해가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등장하며, 각각의 장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특히 구범모, 고시조, 최선출은 만수와 묘하게 닮아 있어 영화의 아이러니를 배가시킵니다.
Q. 결말이 해피엔딩인가요?
A. 표면적으로는 만수가 원하던 자리를 얻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해피엔딩으로 느껴지지 않는 게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꺼져가는 공장 불빛 아래 혼자 쾌재를 부르는 만수의 얼굴에서, 그가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씁쓸한 공허함이 남는 결말입니다.
결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만수는 분명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번 폭력의 방향을 선택했고, 매번 "어쩔 수 없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업을 잃는다는 것이 단순한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기로 이어지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그 감각을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제 경험상 직장이 흔들릴 것 같다는 불안감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이성을 앞섭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결국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조정 앞에서 무력해진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사회는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 이 불편한 질문을 2시간 동안 웃으면서 마주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박찬욱 감독의 솜씨입니다. 보고 나서 뭔가 찜찜하다면, 그게 정상입니다.

